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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백' 위건 강등, EPL 다양성 감소의 문제 2012-2013 EPL



 스리백이 낯설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포백(플랫4) 계열의 포메이션(4-4-2시대를 거쳐 지금은 4-2-3-1이 기본 포맷이 됐지만.)이 전술의 정석으로 정착됐지만 90년대만 해도 스리백을 쓰는 팀들이 지금보다 많았다. '전술의 본고장' 이탈리아 세리에A나 남미에서는 잉글랜드 등 타 리그보다 스리백이 더 보편화 됐다. 가까운 한국 대표팀만 보더라도 포백(플랫4) 보다 스리백의 역사가 더 길었다. 한국의 3-4-3은 2002년 히딩크라는 장인의 숙성을 거쳐 꽃을 피웠다. 94년 미국 월드컵때는 기동력을 바탕으로 한 3-5-2를 구사했다. 전통적으로 빠른 윙어(혹은 윙백)들이 많이 배출되던 한국의 토양에서 스리백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K리그에서는 수원, 경남, 울산, 포항, 전북 같은 팀들이 스리백을 쓰곤 했다. 특히 '조광래 유치원' 시절의 경남이나 2007년 파리아스 포항의 3-4-1-2는 포백 트렌드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스리백의 전형이었다.


<벤 왓슨은 맨시티와의 FA컵 결승전 추가시간에 인생골을 넣었다. 마르티네즈의 용병술이 빛난 순간이었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유로 2012때의 이탈리아 대표팀과 남아공월드컵 때 비엘사 감독의 칠레 대표팀, 나폴리가 대표적이다. 시계추를 더 돌리면 잠머 시절 독일 대표팀과 클루이베르트의 아약스, 그리고 소린, 사네티가 윙백으로 포진한 예전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3-4-3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세리에A는 아직도 타 리그보다 스리백을 쓰는 팀이 많다.(나폴리, 유벤투스, 파르마, 시에나, 우디네세, 제노아, 팔레르모, 삼프도리아 등) 라리가에서는 바르셀로나와 빌바오가 포백과 스리백을 혼용했다. EPL에서도 올시즌 만치니의 맨체스터 시티나 로저스의 리버풀이 시즌 중 스리백을 가동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몇몇 특수한 상황에서의 간헐적 시도에 그쳤으며 플랜B 용도가 대다수였다. 확실한 플랜B로써의 3-4-1-2(혹은 3-5-2)를 구축하려던 만치니의 야망은 실패로 귀결됐다. 때문에 마르티네즈의 위건은 희소성이 있다. 마르티네즈는 비교적 빠른 기간에 스완지 시절부터 써오던 포백에서 스리백을 팀에 이식시켰다. EPL에서도 강팀을 필두로 원톱 혹은 제로톱 트렌드가 스며는 마당에(노리치나 스토크 같이 전형적인 잉글리쉬 스타일도 공존하지만) 원톱팀을 상대로 태생적으로 수적 잉여를 낳을 수밖에 없는 스리백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모험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축구팬들은 EPL에서 확실한 색깔을 내던 '위건 스타일'을 더이상 보기 힘들게 됐다. 위건은 어제 아스날과의 37라운드 패배로 강등이 확정됐다. 


 마르티네즈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뚜렷하다. 일각에선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던 스완지, 노리치의 발전과 비교하며 마르티네즈의 능력에 의문부호를 달기도 한다.(아이러니하게도 마르티네즈의 감독 커리어 첫발은 2007년 스완지였다.) 위건은 1부리그에 올라온 2005/2006시즌 이후로 수년간 강등권을 허덕였다. 살아 남는데만 급급했던건 사실이다. 뒷심만으로 명장 칭호를 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마르티네즈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셀링클럽' 위건의 생리상 매 시즌 선수단 구성에 고민을 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위건은 2010 시즌 폴 샤르너를 WBA, 2011시즌 톰 클레버리를 맨유, 지난시즌엔 모하메드 디아메와 빅터 모지스를 각각 웨스트햄과 첼시로 보내야 했다. 반면 마르티네즈를 옹호하는 입장은 위건이 강등권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던 논거를 늘어 놓는다. 위건이 지난 시즌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는 팀의 주포 샤를 은조그비아와 우고 로다예가가 부상으로 나란히 이탈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리버풀, 맨유, 아스날을 연달아 꺾으며 '생존왕'의 호칭을 얻은 추억을 되새기며 마르티네즈를 추켜 세운다. 시즌 막판 위건의 집중력은 놀라우리만큼 무섭다. 지난 시즌 24라운드까지 승점 16점에 그쳤던 위건은 남은 14경기에서 26점을 쓸어 담는 뒷심을 발휘했다. 위건의 상승세는 마르티네즈 감독이 스리백과 파이브백을 혼용했던 시점과 묘하게 일치한다.    


<데이브 웰란 구단주 마르티네즈는 위건의 1부 생존극장을 같이 써내려갔다.>  



 마르티네즈가 본격적으로 스리백을 쓴 건 지난시즌 후반기부터다. 간접적 계기는 2010년 5월 9일 첼시전 0-8 대패 이후, 본격적으로 가동한건 지난해 2월 11일 볼튼전이다. 첼시전 참사 당시 위건은 다소 생소한 3-3-1-3을 들고 나왔다. 결과는 최악이었지만 전반 20분까지의 플레이는 좋았다. 마르티네즈는 스리백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지속적으로 폭을 넓히라는 주문을 했고, 당시 전술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마르티네즈는 위건 부임할 2009년에도 직전팀 스완지에서 써왔던 4-2-3-1을 그대로 들고 왔다. 플랜B는 4-5-1 혹은 4-4-1-1이었다. 스완지 시절과 차이점은 레온 브리튼의 역할을 위건에선 디아메와 토마스가 번갈아 가며 했다는 점이었다. 위건의 플랫4는 에머슨 보이스(로리 스탐)-캘드웰-알카라즈-피게로아가 맡았다. 그러나 캘드웰, 알카라즈, 피게로아 모두 스리백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이에 착안한 마르티네즈는 오른쪽 풀백으로 중용하던 보이스와 로리 스탐을 보다 전진 배치시켰다. 보이스와 스탐이 버티고 있는 오른쪽은 무난했다. 문제는 왼쪽이었다. 스리백 초기에 왼쪽에선 데이비드 존스가 윙백 역할을 소화했는데 존스의 보직은 박스 투 박스(box-to-box) 미드필더였기 때문에 왼쪽에서 날카로움을 보이지 못했다. 여기서 위건 스리백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발발한다. 지난해 겨울 이적시장에서 칠레 대표팀과 버밍엄의 미드필더 장 보세주르를 영입한 것이다.


 그전까지 위건의 측면은 주로 빅터 모지스와 조르디 고메즈가 책임졌다. 그러나 모지스는 오른쪽에서 더 위력적이었고 고메즈는 직선적인 윙어가 아닌, 레프트 인사이드 미드필더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수비가 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보세주르의 영입은 스리백의 전환을 염두해 두던 마르티네즈에겐 최선의 선택이었다. 보세주르는 왼쪽 측면 전 지역을 커버할 수 있으며 강한 크로스가 전매특허였다. 뿐만 아니라 중앙 미드필더와의 숏패스 연계도 좋고 세트피스 활용도도 높은 선수다. 보세주르가 왕성한 활동량으로 왼쪽을 책임지기 때문에 스리백의 운용에 숨통이 트였다. 약체 위건으로선 공격만 강한 반쪽짜리 선수가 아닌 레프트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의 능력이 필요했는데 보세주르가 그 적임자였다. 보세주르는 리그 절반 이상이 지나서 합류했지만 팀에서 가장 많은 9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보세주르와 피게로아의 연계는 이제 위건의 주 공격루트로 자리매김했다. 이로써 피게로아-캘드웰-알카라즈의 스리백과 더불어 보세주르-보이스라는 윙백의 퍼즐이 맞춰졌다. 중앙에는 두 제임스 맥(맥카시-맥아더) 듀오가, 최전방에 모지스-디 산토-말로니(고메즈)를 꼭지점으로 한 3-4-3이 완성됐다, 올시즌에는 칼럼 맥마나만과 아루다 코네가 모지스와 디 산토의 역할을 대신했다. 올시즌 위건 부진의 가장 큰 이유는 수비진 붕괴다. '수비의 핵' 피게로아(사타구니), 알카라즈(햄스트링), 보세주르(햄스트링) 이반 라미스(무릎), 스탐(발목)이 모두 부상으로 아웃됐다. 마르티네즈는 1월 이적시장에서 보세주르의 대체자로 에스피노자, 알카라즈의 대체자로 폴 샤르너를 수혈했다. 알 합시 골키퍼 대신 조엘 노블레스를 영입하며 뒷문을 강화했다. 이는 분명 어느정도는 효과를 봤다. 위건은 강등 됐지만 어쨌거나 맨시티를 꺾고 FA컵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100% 위건 색깔을 낼 수 있던건 아니었다. 에스피노자는 보세주르만큼의 크로스를 갖고 있지 않았고 샤르너는 종종 실수를 범했다. 이는 위건 스리톱의 전방 압박 부담이 가중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엘 정도만 제 몫을 해냈다.       

<마르티네즈의 '신의 한수' 장 보세주르와 잉글랜드의 미래 칼럼 맥마나만.> 


 마르티네즈를 단순히 스리백을 썼던 EPL의 희귀 전술가로만 평가해선 안될 것 같다. 그전에 마르티네즈는 열악한 팀 상황에 맞게 팀을 재편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졌다. 주축들이 떠날 때도 다른 자원들로 메울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마르티네즈는 적시적소에 맞는 영입으로 자신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입증해냈다. 그 유연함은 태도 뿐만 아니라 전술로도 이어졌다. 경기 중에서도 스리백과 포백을 수시로 변형했다. 똑같은 3-4-3을 쓸 때에도 공세냐 수세냐에 따라 다른 방식의 3-4-3을 가동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윙백의 위치 변화에 따른 방식 외에도 스위퍼의 활용법에 있어서도 남 달랐다. 위건은 투톱을 쓰는 팀을 상대로는 스리백의 원형을 유지했다. 피게로아와 알카라즈가 존디펜스와 맨마킹을 병행하고 흘러나온 볼을 캘드웰이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때 스위퍼는 사전적 의미의 역할(sweep)을 했다. 원톱의 팀에겐 캘드웰을 보다 전진 배치했다. 이러한 변형을 통해 위건은 캘드웰을 보다 공격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선수를 보는 안목도 뛰어나다. 아일랜드 U-21 출신이자 SPL 올해의 영플레이어 출신 제임스 맥카시는 마르티네즈 부임과 함께 중원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올시즌 FA컵에서 맹활약한 칼럼 맥마나만은 며칠전 잉글랜드 U-21에 선발되기도 했다. 캔자스시티에서 불러들인 에스피노자는 세밀함은 떨어졌지만 왕성한 운동량으로 좌측면을 커버하며 보세주르의 공백을 메웠다. 폴 샤르너를 상황에 따라 센터백과 홀딩 미드필더로 쓰며 중원 싸움에 가담시켰다.  


 위건의 강등을 단순한 일개 팀의 강등으로 치부하기에는 아쉽다. 그들의 강등은 EPL에서 뚜렷했던 또 하나의 개성이 사라진다는 의미로 다가온다.(물론 토트넘, 스완지, 스토크, 사우스햄턴 등 확연한 개성을 가진 팀들도 잔존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스타일의 소멸이다. 위건의 색채는 원색에 가깝도록 선명했기에 그들이 빠진 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최근 프리미어리그에서 위건만큼 스리백을 유연하게 구사했던 팀이 있었던가. 위건 스리백의 유동성은 아메바의 변이와 같다. 경직되지 않고 부드럽다. 특화된 전술을 운용하는 팀 하나가 줄어든다는 것은 프리미어리그 발전에도 별로 도움되지 않는다. 이는 다양성의 감소로 이어진다. 풍성함과 다양함은 전술 생태계를 건강하게 한다. 새로운 형태의 경기 방식이 성공을 거둔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응법도 같이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발전한 파쇄법은 또 다른 전술의 진화를 부추긴다. 전술의 역사는 면역학적 변증법처럼 발전을 거듭했다. 남들이 하지 않은 방식으로 생존을 거듭해온 마르티네즈의 도전은 그래서 더욱 가치있다. 하위권 성적에도 불구하고 EPL에서 참신한 스타일을 만들어낸 마르티네즈와 위건에 찬사를 보낸다. 마르티네즈가 팀을 떠날지는 미정이지만 그가 남긴 축구철학은 위건의 위대한 유산이다. 그것은 전술 이상의 가치다. 위건의 정신으로써 계승될 것이다. 전술은 바뀔지언정 팀 스피릿은 영원할테니. 굿바이 마르티네즈, 굿바이 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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